詩人의 마을
시간을 벗기며 / 이원희
고운(孤韻)
2008. 4. 17. 17:03
-시간을 벗기며/이원희-
톡, 둥근 어깨를 치자 향기가 깨어난다
꿈의 질료를 붉게 익혀놓은 사과
꽃 떠나간 자리, 그 아린 자리에
꼭지로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생을 익혔으리라
두껍게 더러는 얇게
봄에서 여름을 깍는 동안
꽃숭어리가 끌어안은 하늘 풀어놓는
사과 껍질 같은 길, 나는 간절히 바래어왔다
내 꿈의 질료들은 붉음으로 이울지 못하고
길 위에서 지칠 때 쯤
우박마저 못질한 상처
그쯤에서 길이 끊어진다
사과 잡은 팔목의 푸른 핏줄이 눈에 들어온다
한 때 포기하고도 싶었다
어둠이 이내처럼 내려앉는 저녁
두텁게 상처를 도려내고 다시
흰 살 속에 바람을 새겨 넣은 일
가을햇살을 끌어안으며 사과를 부풀린 일
폭풍우를 견딘 신산한 시간을 벗기며
사과 한 알 만큼 고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