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마을

花山 / 이 혜미

고운(孤韻) 2008. 4. 17. 17:06

 

花山 / 이 혜미


이름 없는 희망이 불씨처럼 꽃가루로 휘날리던 날
나는 할머니보다 더 늙어 버렸다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장아장
아가의 걸음걸이를 닮아가신다

꽃이 참 좋구나,
눈빛이 닿는 순간 연소되어지는 꽃들

꽃송이들이 탄식처럼 솟아오른다
잠시 힐끗했을 뿐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서둘러 風化作用하는 삶들이 있었다

소멸을 황홀하게 바라본 것이 죄였다 환하게
피어나는 형벌 뜨겁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들 식빵에 듬뿍 발라진 딸기잼처럼
줄줄 산밑으로 흘러나 볼까

꽃이 참 좋구나, 붉은 꽃을 잔뜩 발라
덥석덥석 산을 먹어치우는 봄

봄이 당도한 산이 온통 불바다다
모두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가슴에 화상 자욱 하나씩 봄꽃처럼 품은 날
저만치에서 아장아장 아가의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나는 이 미친 봄에게 花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