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수첩(孤韻手帖)

눈(雪) / 고운

고운(孤韻) 2005. 6. 17. 20:57

눈(雪)

 

나무들의 옷 벗음으로 선명해진 들판
그 탱자나무 울타리속으로
오늘은 가득 가득 겨울이 차고 있다
아이들은 들의 매운 손끝을 느끼지 못하고
바람은 철새의 날개끝에 숨어 달려오고 있다.

 

1분이면 완성된다는 컵라면을 훌쩍거리고
종이 컵속의 따끈한 커피를 낙하시키며
점점 커가는 망각의 여울 소리를 저울질 하던
여린 몸들을
겨울은 자꾸 핥아내고,

 

빈가슴에 채운 그리움으로
캐고 또 캐어 보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찾을 길 없고
두꺼운 벽위의 창살 뿌리엔
끈적한 世情의 목소리만 걸려있다.

 

잔뜩 흐린 하늘이 으스스 춥긴 하지만,
냉돌방 천정의 메주덩이가 시리긴 하지만,
지우고 싶은 움추렸던 나날들을
가슴 재우듯 하얗게 묻어 버리고
이제 조금은 순결해 질 수 있기를.

 

83.  12.  27.  火    고운